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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풍요로운 구속

29. 실패

by 현덕. 2023. 9. 16.

2007.1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좋았겠지만, 분명한 건 그때는 몰랐다는 거다. 그리고 앞으로 10년 뒤에 알게 될 것도 지금은 모른다. 궁금하지 않은가? 자신이 10년 뒤에 알게 될 것이 무엇인지. 그래도 다행이다. 그때 몰랐던 것을 지금은 알고 있지 않은가. 10년 뒤에 알게 될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지금 알고 있듯이 그때엔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단, 조건이 있다.

  나는 물을 싫어해서 좀처럼 물가엔 가지 않는다.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다. 당연히 수영도 잘 못한다. 누군가 나를 물에 밀어 넣고 발바닥을 바늘로 콕콕 찌른다면 혹시 바르작거리며 살아 나올지는 모르겠다.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하겠다고 맘먹은 지 10년이 넘었지만, 원어민만 못 알아듣는 영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책장에 쌓여있는 영어책 수는 누구보다 많다. 뿌듯하다.

 

 

  수영을 못하는 것은 호된 경험 때문이라는 핑계가 있지만, 영어는 잘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 다 아시다시피, 공부를 게을리해서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알게 된 것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된다는 깨달음이 아니라, 적어도 한 발짝은 앞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이다. 조금씩이나마 움직이고 있었고, 그때와 지금은 내가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는 얘기다. 좀 머쓱하긴 하지만.

  종종 목표에 대한 두려움이 앞선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앞으로 10년 뒤에 무엇을 - 얼마나 - 알게 될지 지금은 분명히 모른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땐 몰랐던 것처럼. 그러나 믿어야 한다. 오늘 모르는 것을 내일 알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는’ 것뿐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지 않다. 지금 내 손에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은 것은, 잡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조건이다.

 

 

* 2004년~2009년 가톨릭 청년주보에 연재한 글입니다.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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