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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풍요로운 구속

27. 잔상

by 현덕. 2023. 9. 15.

2006.11

 

  여럿이 함께 여행을 하다보면 저마다 보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이 달라 티격태격 싸우기도 한다. 그러다 몇몇이 양보해서 모두 함께 다니기도 하고, 만날 장소를 정해 놓고 각기 흩어져 돌아다니기도 한다. 양쪽 다 어느 하나는 희생해야 한다. 보고 싶은 곳을 희생하든가, 함께 할 시간을 희생하든가. 간혹 극단으로 가서 둘 다 희생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누구나 한번 쯤 겪어 보았을만한 이런 상황이 오면, 대개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금씩 공감대를 만들기 시작하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 ‘반드시 함께 가야’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함께도 따로도 가능하다. 특별히 훈련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여럿이 함께 하는 여행은 대개 이렇게 된다.

 

 

  여행을 인생이란 단어와 바꿔 봐도, 아마도 그다지 다르진 않다. 뒤쳐진 일행을 위해 기다리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갈라섰다가, 다시 모인다. 다시 만날 것을 알기 때문에 따로 있어도 즐겁고,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같이 있어도 불편하다. 나의 것 남의 것이 희생되고 채워지는 동안, 함께 하는 것과 따로 있는 것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거미줄처럼 얽힌 믿음과 불신은 끊임없이 서로를 비웠다가 또 채운다. 합리적인 판단이나 정의감에 불타는 단합은 여행 속에서 의미가 걸러져서 숙소로 돌아온 지금 나누는 얘기들과 함께,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그 무엇이 된다. 이해할 수만 있다면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나와 당신의 관계처럼, 여행에서 얻어야 할 것을 꼭 얻으려고 애쓰지는 않아도 된다. 이미 내 안에 있는 당신의 잔상만으로도 충분하다.

 

 

* 2004년~2009년 가톨릭 청년주보에 연재한 글입니다.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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