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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풍요로운 구속

28. 새로움을 위하여

by 현덕. 2023. 9. 15.

2006.12

 

  다시 연말이다. 일없이 맘만 분주해지는 때라, 늘 하던 일에도 정신을 놓기 일쑤다. 속 시끄러운 지난 일들이 정리되기도 전에 새해가 올 것이 뻔한데, 그래도 새롭다는 것은 항상 뭔지 모를 기대를 갖게 한다. 어느새 내 기억은 좋지 않은 일들을 승화시키고, 좋은 일들만 떠올리려 하는 추억 모드로 들어간다. 일부는 망각했으며, 일부는 증폭된다.

  사람이 자는 동안 뇌는 나름대로 기억 정리 작업에 들어간다고 한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잊게 하고, 일부는 장기 기억 영역에 두어 꺼내 쓸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미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 ‘망각’때문이라는데, 정신 놓은 채로 새해를 맞고 싶지 않다면 잊을 건 잊어야 한다는 얘기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서 곤란한 경우가 더 많긴 하지만.

 

AI - I'm going into a memory mode where I try to remember only good things.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고 나면 오늘 내가 뭘 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잠도 깊은 잠을 자면 언제 잤나 싶게 눈 뜨면 아침이다. 그렇게 1년이 후딱 지나버리고, 이제 자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다. 잠잘 때처럼 뇌가 알아서 정리하지는 않겠지만, 망각을 위한 시간을 두지 않으면 새로울 것도 없을 것 같다.

  첫차를 타고 집을 나서거나, 막차를 타고 집에 오는 기분이 그다지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건, 그 사이에 있던 풍부함을 기억하기 때문이 아닐까. 새로움을 위하여 해야 할 일이 잊는 것이라니 좀 아이러니하긴 해도, 풍부한 내일을 위해 나를 좀 비워두는 것도 그럴듯하다. 내일 또 정신없는 하루가 시작될 텐데, 잠은 좀 자야지. 뇌의 그 어떤 기능 한번 믿어보고.

 

 

* 2004년~2009년 가톨릭 청년주보에 연재한 글입니다.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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