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6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인데, 그 죽음에 왜 눈물이 날까. 재임 기간 딱히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닌데, 크나 큰 무언가가 무너졌다는 이 느낌은 뭘까. 검찰은 즉각 수사를 종료했고, 정치권은 바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두려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분향소 마저 둘러쌀 정도로 그들은 겁쟁이였다. 아늑하다는 사람도 있었다는 발언은 그냥 해프닝으로 웃고 넘기자.
이후 시위가 있었고, 모습은 마치 5공 시절의 그것과 흡사했다. 이천 십 년을 향해가는 시점에, 잡혀갈지도 모르니 말조심해야 한다는 농담이 오가고 촛불 든 사람은 시청 앞을 지나갈 수도 없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타임머신을 타버렸다. 그들은 잃어버린 10년을 찾았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피 같은 20년을 잃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치르느라, ‘국민’이라는 단어조차 잊은 모양이다. 뭐라 욕을 해대고 싶어도, 그조차 귀찮을 정도로 이미 딴 세상 사람같이 느껴진다. 정부와 국민의 생각의 격차가, 남북의 그것 이상인 듯하다.
민주주의의 형식이 아니라 ‘가치’에 대해
군부 독재시절 나는 어린 학생이었다. 민주주의의 가치라든가 하는 것은 젊은 혈기에 가려 그저 막연한 개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잠시 암울한 시절을 겪었을 뿐 우리나라는 원래 민주주의 국가였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은, 민주주의의 형식이 아니라 ‘가치’에 대해 일깨워 주었다. 국가를 이끄는 이념이 어떤 식으로 세워지고, 그것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해 주었다.
삶과 죽음을 가치로 따지면 어느 쪽이 무거울까. 누군가 죽었을 때 그를 위해 울어줄 한 사람이 있거나, 세상을 떠난 지 수십 수백년이 흘러도 그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삶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아닌가도 싶다. 삶은 과정이고, 아쉽지만 그 결과를 정작 자신은 보지 못한다. 그도 결과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2004년~2009년 가톨릭 청년주보에 연재한 글입니다. 일부 수정하였습니다.